본문 바로가기

아호

[종교 이야기] 불교에 관한 생각 - 2

불교에 관한 생각 2편입니다.

강한 영향력을 주다

불교가 동아시아를 정신적으로 오랫동안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휩쓸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일까라는 당연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불교가 주는 강력한 화마에 오랙동안 잠식당했던 중국에는 이미 공자 노자를 비롯한 샐 수 없는 지식인들에 의해 그럴듯한 정신적 구조 틀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맹위를 떨쳤던 것이었을까에 대한 질문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주는 가장 매력적인 인간의 내면적 영역에 대한 탐구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다.

공자 사상

핵심적 중심 세력을 잃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던 당시의 중국에 이전의 것에 대한 진하게 묻은 향수를 담고 회고와 복귀를 주장하는 중심적 틀에 대한 미련이었기에 거기에는 인간의 대한 요구는 있었을지언정 인간에 내면에 대한 본격적인 반성은 존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노자에는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이 망할 놈의 세상에 대한 도피와 반성은 있을지언정 왜 이런 것 인가에 대한 주채로서 인간에 대한 탐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극동 지역에 위치해 있어 민족의 뿌리마저 불분명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류적 문명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아직까지 샤머니즘적인 정신적 구조 틀 속에서 헤매던 종족들에게는 입맛에 맞는 적당한 양념과 함께 들어온 불교의 인간 탐구는 실로 매력적이었음에 분명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언제부터 그럴싸하게 정신적 틀을 지니고 유전자 복제를 멋지게 작동하려 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마는 분명한 것은 인간이라는 영장류가 유전자 복제를 고도의 복잡한 체계를 동원하여 시작한 동물임에는 분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유전자 복제 거부

당연하게 이러한 고도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종교니 철학이니 떠드는 정신적 구조 틀이 그 핵심에 있음은 불문가지라고 하겠다. 즉 종교나 철학이 인간의 원활한 유전자 복제를 위한 어느 체제를 형성하고 유지케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만 단순하지마는 않아 꼭 어느 체제에 이단아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는 그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정신적 틀이 수명을 다하가고 있음을 말하는 징조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부처라는 사람은 이렇게 한 시대가 수명을 다하가고 다른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혼 난기에 태어나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인데 부처를 비롯한 당 시대의 인물들이 발견한 것이 특이한 것은 그저 유전자 복제를 위해 어느 체제를 순순하게 수용하게 하는 체제 틀로서만 종교를 단순하게 창립한 것이 아니라 왜 유전자 복제를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유전자 복제 거부를 통한 인간의 자기 확인에 들어간 것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유전자 복제 거부는 단순하게 남성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닌 여성에게도 유전자 복제 거부권을 주어 여성에게도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정신적 독립권이 있음을 선포한 것에까지 이른 것이다.

무소불위한 신의 능력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을 둘러씨고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론적 일체의 거부를 통해 자아(self)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며 이 자아라는 것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고 세상을 통제할 수 있음을 깨닫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말은 당시의 주류 사상이었던 힌두이즘이 제 의릉 통해 집단의 안전과 안녕을 꾀함으로써 각 개인의 존재를 확인 힘으로 종국적으로 개인의 평화를 희구하는 고도를 지니고 있었다면 이제는 각 개인이 존재함을 깨달음을 통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재단할 수 있는 인식의 지평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일체의 초월적이고 무소불위한 신의 능력에 대한 사실상의 부정은 인간 스스로에 인식적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즉 부처 시대 이전까지 인간이라는 것은 집단의식이라는 것을 통한 유전자 복제 구조의 항상적 유지가 목표였다고 한다면 이제는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마저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의 스스로에 대한 발견으로서 이는 본격적으로 인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인간 인식의 발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유전자 복제 작업까지는 부정한 것이 아닌 유전자 복제 거부자들을 우위에 두는 이론을 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찌하든 이렇게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사뭇 다른 인간의 풍경을 노출시키는 데 이는 모든 인간이 유전자 복제 거부 능력을 거절할 수 있다는 데에까지 진전함으로써 이전의 독점적 세력이 가지고 있었던 독점 유지 체제를 깨는 역할을 하게 되며 각 개인이 주체성을 깨닫게 하는 정도에 다다른 것이다.

부처의 사고 틀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그의 2% 부족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사에 있어서 최초로 어느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윤리니 도덕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부정함으로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이것에 이은 결론으로서 인간의 독립성을 완벽하게 파악한 인간이라는 점에 있다. 즉 유전자 복제를 원활하기 위해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이익을 찾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현상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시작하여 이것을 이론적으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틀을 정립한 최초츼 인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에게 있어서 인간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유전자 복제를 위해 무한한 욕망을 펼쳐대는 무한한 자유 속에서의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 복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줄 아는 길로서 인간을 인도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유전자 복제라는 본능적인 욕망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줄 아는 인간으로 인도한다는 측면에서의 욕망 통제형 혹은 욕망 공유형 인간 인식이라는 것이다.

부처가 인식한 인간의 내면 세계

이전의 인간의 대한 반성적 토대를 담고 있으며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발견된 인간의 자아를 가지고 당시의 혼란한 시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나름의 충정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집단적 제의가 주는 독점적 욕망을 깨부수기 위해 그는 오히려 일체의 부정을 통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보았던 것이고 이를 토대로 독점적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세계에 정의와 질서를 가져오려는 새로운 정신적 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적 틀은 공자가 주는 지극히 체제 유지적인 복고주의적 태도와 노자가 주는 현실적 변혁 없는 정신적 만족으로 그치는 미적지근함에 지친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인식의 발견의 틀을 주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처는 이후 왕권의 보호 아래 진행된 지나친 관념적인 경향에로의 치우침에 불구하고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아관과 비교하여 볼 때 현재의 인간들에게 어떻게 자아를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상당한 시사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로써 불교에 관한 생각 2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