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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성 시스틴 성당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면 플라톤의 손은 하늘을 향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은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다. 플라톤은 이상을 추구한 관념론적 철학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을 추구한 유물 몰 적인 철학자라는 이야기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라파엘로뿐 아니라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라파엘로의 견해에 동의하는 듯하다.

행복 추구

이러한 라파엘로가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양 철학자에 대한 견해는 바른 것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오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태도에 대해 잠깐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더불어 오랫동안의(20년) 세월을 함께한 플라톤의 제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두 철학자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 철학적 면모를 살펴보기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영향 아래에서 교육받았음을 상기함으로써 근본적으로 그의 철학이 플라톤적 배경을 전제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플라톤을 관념론자의 시조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물론자의 시초 롤 보는 시각은 지극히 철학의 전면을 보지 못하는 일면 안에서 비교하고 평가하는 단견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아무리 물질 너머의 이상적인 물질의 상태를 전제했다고 해서 그의 철학이 물질 자체를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철학은 물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변성과 혼돈 때문에 물질 너머에 변하지 않은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도 근본적으로 플라톤과 다른 바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물질에서 출발하는 이상적인 상태를 염두에 두고 그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는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인간의 돌입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어떤 소수의 독점자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자유민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라는 차이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비해서 요즈음 기준으로 보아 외형상으로 자연과학에 더욱 치중하였다고 하여 그의 철학을 유물론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미국의 어떤 기독교적 신앙에 충실한 자연과학자를 유물론자라고 규정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상적인 존재 양식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역시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고 이러한 이상이라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 플라톤보다는 조금은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제시함으로서 급격하게 어떤 이상을 인간에게 불쑥 내밀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즉 인간이 물질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플라톤처럼 물질과 이상이라는 두 측면으로 갈라놓고 물질은 악하니 우리 모두 이상적 상태로 돌입해 들어가자라는 과격한 슬로건 대신에 이상에의 도달은 일정한 틀을 지니는 법칙의 계속적인 상승과 고양의 과정에 의해 성취되는 시간의 과정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을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질긴 이성적 노력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상에 도달은 즉각적으로 요청되는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상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즉 시간의 경과 속에서 성취되는 점진적이고 총체적인 과정으로 보았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물질과 이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태도는 상대적으로 플라톤보다는 결여되어있다고 볼 수 있는 있으나 그랗다고 그의 스승의 성과인 이상에 대한 몰입을 인간 세계에서 포기한 것은 아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전하게 존재해야 할 이상적인 존재 양식에 대해서 인간이 항상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동일하며 단지 그는 그것을 소수 독점자가 과격하게 만들어 내는 형식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성적 자유민들에게 그것을 둠으로서 플라톤과 궤를 달리하게 되고 결국은 플라톤을 떠나 지식을 팔아 삶을 영위하는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을 갖추기 된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인으로 묘사된 소수의 귀족적 틀에 염두에 둔 프라톤의 사회적 변혁 추구를 거부하고 당시의 플라톤이 부패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던 자유민 중심의 민주적인 개선 하여 유지하는 자유스러운 상태의 공동체를 상상한 인물 이리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억압 계급의 지배계급

그런 점에서 두 철학자가 어느 정도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적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사람 공히 현재 기준으로 평가하면 관념론자에 불과하며 그들의 차이는 관념론이라는 일면의 틀 안에서 발생한 분파적 갈등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꼭 눈여겨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유물론자는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을 배격하고 오직 보이는 세계로서 인간과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갈등은 주위의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사회로서 그리스 사회를 앞으로 어디에 중심을 두고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지배계급 내에 갈등이며 그들이 결코 노예에 대해 문제 제기라든가 아니면 야만인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하여 피지배 계급에 대한 어떤 동정의 시각을 가지고 고민한 철학이라든가 사고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재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학문에 필요한 기본적인 틀을 잡아놓았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지 그가 기반하고 있는 철학 전반을 수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흔하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 플라톤을 정의 실현자로서 마르크스에 비유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유주의적인 자유의 신봉자로 묘사하는 경우인데 이는 화가였던 라파엘로의 단견보다 못한 매우 자의적이고 악의적인 분석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급격한 시회적 변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비슷하다고 하겠으나 동시에 마르크스가 가졌던 역사관은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고 있고 근본적으로 그의 논리학에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석은 마르크스를 플라톤처럼 단순한 이상주의자로 격하시키려는 혹은 소수의 독점적 체제를 만들어 낸 귀족주의적 면모로 마르크스를 바꾸어 냄으로서 뮤 물론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사상이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한 억압 계급의 지배계급에 대한 정당성의 제공을 깔아뭉개려는 음험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그 자신이 행복은 돈 있는 자유민 이상 계급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철학은 자유민 이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철학은 그리스적 정통에 서있는 정복적 발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현재의 인간들이 여전하게 그가 마련한 개념 틀을 사용하는 한에 있어서 여전하게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적 정복적 사고 틀 안에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신정주의적 사고

플라톤을 근간으로 한 어거스틴의 신정주의적 사고 때문에 중세 동안 묻혀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발굴함으로서 서양 사상이 풍부해졌다고는 하니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속적이거니 유물적이지 않은 전통적인 그리스적 사고에 깊숙하게 뿌리를 대고 있었던 관념론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던 정복 지향적인 지배자였음을 알아야 하며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아리스텔레스적 개념을 사용하는 과학이 인간에게 해방을 가져와 준다는 생각이 얼마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큰 오해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르쳤던 알렉산더가 유럽을 넘어 인도에까지 그리스적 사고를 전달할 때에 아마도 그는 그리스적 사고의 확장에 흡족힌 미소를 지었을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